입춘이 지났다고는 하나 아직도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하는 오후, 더미 산수화로 유명한 강혁 작가를 만났다. 더미 산수화(dummy landscape), 아마도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더미(dummy)의 뜻은 영어로 마음대로 구부렸다 폈다 하는구관절 나무인형을 뜻하며, 우리말 뜻은 한 장소에 모여 있는 큰 덩어리를 의미한다. 더미 산수화는 기존의 산수화와 달리 더미라는 소재를 이용해, 만년필로 산수화를 그린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 멀리서 보면 그냥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 같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수많은 더미들이 그림을 메우고 있음을 알게 된다.

▲ 강혁 작가가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강 작가는 왜 하필 그 많은 소재들 중 더미를 그림의 소재로 선택하게 됐을까? 2011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미국 뉴욕 뉴저지에 계신 스승님 댁을 방문했다가 작업실에서 우연히 가을바람에 떨고 있는 커다란 나무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 마다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바람의 등살에 견뎌 내지 못하고 떨어지는 장면이 마치 사람처럼 보였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덧없는 우리 내 인생사처럼 느껴졌다. 떨어진 나뭇잎은 다시 나무의 거름이 된다. 결국 나뭇잎은 나무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즈음 강 작가가 우연히 손에 잡은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였다. 그는 이 책을 읽으며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고. 사회모순과 부조리한 이 세상을 명쾌하게 정리한 그 책을 읽으며 갑자기 작품에 영감을 받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만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떠오르는 영감을 바로 메모하고 그것을 다시 그림으로 표현하기를 반복했다.

▲ 강혁 작가 모습

그가 이렇게 쓴 메모지는 일 년에 A4용지 다섯 권 분량 정도라고 한다. 더미산수화의 나뭇가지는 사회의 거대한 구조와 조직을 상징하며 잎사귀는 사람 또는 개개인이다. 그 잎사귀를 더미라는 소재를 이용해표현했다. 산은 각 사람들의 삶의 크기를, 바다는 사람들의 기쁨과 행복을 나타내는 개인주의적, 집단주의적 성향을 파도로 표현한 것이며 죽음에 대한 고민을 바위로담아냈다. 즉 나무, 산, 파도, 바위를 표현해, 더미 산수화를 그렸다. 검정은 절망을, 하얀색은 희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더미 산수화는 산수화의 조형을 추구하면서도 작품 안에 인간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담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자세히 보면 자연과 인간의 뒤틀린 관계처럼 더미들의 관절이 비정상적으로 꺾여 있다. 그러므로 더미 산수화는 기존 산수화의 미적 개념에서 벗어나 자연 파괴를 일삼는 현대 문명과 거대한 사회 조직에 억압당하는 개개인의 삶 등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주제를 담고 있다. (다음달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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