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종종 파티 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들에게 파티는 일상이며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파티문화는 아직 생소한 낯선 문화다. 특별한날이나 기념하고 싶은 날에 큰 결심을 하고 진행하는 것이 우리나라 파티 문화다. 여전히 '파티'라는 문화에 낯설어 하는 우리나라. 그렇다면 30여전에는 어땠을까? 당시에는 더욱 생소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차이를 극복하고 미국에서 파티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이 있다. 주인공은 바로 파티 디자이너 영송마틴(Youngsong Martin)이다. 미셸오바마를 비롯해 오프라 윈프리 등 유명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영송마틴은 미국 상류사회의 결혼과 파티를 전문적으로 기획하고 있다. 탁월한 감각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세계적인 파티 디자이너가 된 영송마틴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영송마틴 와일드플라워 린넨 대표가 청년들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전하고 있다.

영송마틴이 청년에게 전하는 직언직설
1979년, 스물 한살이였던영송마틴은 과감하게 미국 길에 오른다. 1979년 당시 국내 정서상, 외국으로 떠나는 자체가 매우 힘들었을 터. 게다가 영송마틴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혈혈단신으로 미국 행에 몸을 실었으니 얼마나 떨리고 두려웠을까?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희망만 보고 미국으로 가게 됐다"고 고백했다.

"저는 가난한 집안 막내딸로 태어났어요. 새마을 운동 노래를 들으며 청소년 시기를 보냈고, 또 제가 원해서 산 옷이 없었어요. 늘 언니 옷을 물려 받아서 입었죠. 근데 웃긴 게 물려 받은 옷을 보며 '이 옷을 어떻게 하면 예쁘게 입지'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부터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됐나 봐요. 이렇게 힘든 시기에 태어나서 모두가 어렵게 사는 모습을 봤을 땐 우리나라가 못 사는지 몰랐어요. 근데 1979년 미국에 가보니깐 '한국은 정말 가난한 나라'라는 사실이 확 느껴지더군요"

이렇듯영송마틴은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낸 그 시절, 오로지 '희망'만을 안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잘했던 바느질 기술을 살려 세탁소와 양장점 등 거친 일을 마다하지 않고 늘 열정적으로 삶을 개척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구호물자를 파는 곳이 있어요. 입기 싫은 옷이나 필요 없는 옷가지를 놓고 파는 곳인데, 거기 대부분의 옷이 1달러에 팔아요. 싼 옷을 사서 고쳐 입고 나가면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어디서 샀냐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래서 옷을 고쳐 입고 외출을 할 때면 '오늘은 또 어떤 칭찬을 들을까'라고 기대하곤 했죠. (웃음).

미국에서도 여전히 힘들고 고된 삶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개척하며 꿈을 잃지 않았다. 특히 바느질이라는 강점을 살려 본인이 꿈꾸던 패션 분야에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고, 또 그는 이에 멈추지 않고 이를 발판 삼아 '파티 디자이너'라는 또 다른 분야에 도전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던 그는 어느덧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파티 디자이너가 됐다. 그를 보며 파티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이 있는 등 영송마틴은어느 순간 젊은이들의 '롤모델'이 됐다. 이에 대해 그는 "내가 한국에서 왜 셀러브리티인줄 모르겠다. 하하. 아무래도 바른 소리를 잘해서 그런 것 같다"면서 "한국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며 진심을 담은 충고를 전했다.

"제가 20년 뒤에 한국에 다시 돌아가니 한국은 부자나라가 됐더군요. 빠른 변화와 엄청난 부를 이루며 잘사는 나라가 됐지만 젊은이들은 더 나약해지더라고요. '나보다 가진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은데 왜 나약할까'라는 고민을 한적이 있는데, 한국 청년들은 너무 많은 '공식들'이 존재해요. 우선, 태어난 순간부터 서울대를 목표로 너무 열심히 공부하더라고요. 또, 대학에 입학하면 부모님이 원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거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뭘 하라고 하면 정말 그것이 될까 봐 무서웠어요. (웃음). 나는 바느질을 좋아하고 잘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직업을 갖고 싶었거든요"

▲ 영송마틴 와일드플라워 린넨 대표가 힘겹게 살던 어린시절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본인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이어 영송마틴은 한국 청년들의 마지막 공식으로 '모두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어한다'고 정의 내렸다.

"모두 대기업에 가고 싶어해요. 만약 내가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생각하면 너무 끔찍해요. 한 달을 버티긴커녕 이상한 사람으로 찍혔을 거 같아요. 하하. 전 제가 이런 공식을 따르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제가 걱정되는 건, 작은 회사의 사장님들이 없어질까 무서워요. 모두가 대기업 입사만을 원하면 나중에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님들이 사라질 거 아니에요? 제가 어렸을 땐, 대기업이 별로 없었어요. 작은 사업체가 많았고 이를 운영하는 사장님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이들을 보면서 전 늘 배우고 꿈꿨어요. '나도 저런 사장님이 돼야지, 또 나도 저렇게 열심히 살아야지'하고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는 연신 대기업 입사대신 작은회사의 사장님을 꿈꾸라고 할까? 바느질부터 한 회사의 사장님이 된 영송마틴은 본인의 경험과 이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대기업에 입사하면 그 업무에 대한 부분만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작은회사에 들어가서 시작하면 회사의 모든 부분을 볼 수 있어요. 회사 사장님의 표정과 말투를 직접 보고 들으며 경영을 배울 수 있죠. 또 제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대기업 입사를 꿈꾸고 실현하면 더 이상의 꿈과 희망이 없어지잖아요? 그러고 나면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내 자아는 뭐지?'라는 한탄을 하게 되더라고요. 사람은 늘 꿈을 꾸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경영하는 부분에서는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늘 공부하고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동하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그는 자동차 안에서 하버드 강연 또는 역사 관련 오디오를 들으며 자기계발을 하고 있다고. 늘 바쁜 일정 때문에 따로 배울 시간이 부족한 영송마틴은 "누구나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쪼개서 잘 활용해야 한다"며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렇듯 스스로의 공식과 배움의 자세로 본인의 삶을 개척한 영송마틴. 그는 청년들에게 고한다.

▲ 영송마틴 와일드플라워 린넨 대표와 영송마틴 대표의 팬이 포옹을 하고 있다

"스스로를 믿고 솔직해지세요. 본인이 누구이고 스스로를 잘 알잖아요? 방황하지 말고, 또 남이 주는 공식 말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요. 본인의 인생을 살아주는 사람은 본인뿐이에요. 타인을 롤모델로 설정하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가 롤모델이되야죠. 인생에는 공식이 없으니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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