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셋째 날. 아이들은 각자 제가 소속된 학교와 유치원으로 가고,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늦게 출근하는 가장을 위해 늦은 아침을 준비 하고 있다. 오늘은 마치 4월의 그 날처럼 온화하고 따뜻한 날이다. 가을을 타나보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날이다. 단잠 자는 그를 깨워 간단한 아침상이 차려진 식탁에 앉혔다.

그리고 작은 수첩과 분신이 되어버린 스마트 폰을 주머니에 넣고 출발! 어디로? 글쎄... 그건 신발 신고, 엘리베이터 기다리면서 생각하자. 하고 어느새 도착한 곳은 우리 동네 대표적인 명소. 아이들과 주말에 딱히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날이면, 휙 바람이나 쐬러 가자! 하며 찾는 곳.

▲ 4.19 국립묘지
 이곳 4.19국립묘지. 정확한 명칭은 ‘국립 4.19민주 묘지’ 매년 4월이면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거리 곳곳에서 4.19문화제가 열리고, 이 곳에서는 ‘전국 어린이 그림대회 및 글짓기 대회’가 열린다. 작년부터 큰아이 광준이도 이 대회에 참가하여 나라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곤 했다. 가까우니 자주 찾게 되고 익숙한 공간임은 맞는데, 정작 어른인 나는 ‘4.19가 무엇이냐?’고 질문 받는다면... 질문을 한 그에게 무엇이라고 설명 할 수 있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 즉, 대상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도리어 대상에 대하여 잘 알기 어렵다는 옛 속담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 그래서 등잔 밑의 어둠을 밝혀 보려 가깝지만 먼 당신이었던 ‘4.19혁명’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유명 지식 포털 사이트 네** 지식백과를 참고했다.
1.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개표를 조작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하면서 영구집권(永久執權)을 꾀했던 이승만(李承晩)과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비합헌적(非合憲的)인 방법으로 헌정체제(憲政體制)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 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2. 의의
4 ·19혁명은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主導勢力)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義憤)이 집단행동을 취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변전(變轉)하고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4 ·19혁명은 한국의 정치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轉機)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一大事件)이었다.
 
첫째,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民主意識)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西歐)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식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國政)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 ·19혁명으로 나타난 점이다. 4 ·19혁명을 한국 민주투쟁사의 제일보(第一步)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4 ·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민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하였다.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국적 표현의 
▲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19년 3 ·1 독립운동과 1926년 6 ·10만세사건, 그리고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 ·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넷째, 4 ·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脆弱性)으로 미완(未完)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4 ·19혁명의 고귀한 피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가장 민주적이며 국민적 신망을 받는 국정이 이루어지고 참다운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허약하고 무능한 정부나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은 민주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19년 3 ·1 독립운동과 1926년 6 ·10만세사건, 그리고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 ·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국민적 각성이 결국 5 ·16군사정변을 초래한 결과가 되었지만, 4 ·19혁명이 5 ·16군사정변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4 ·19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감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4 ·19혁명에서 촉구되고 추구된 민주이념과 사회정의의 실현은 한국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최고가치(最高價値)임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는 점만으로도 4 ·19혁명은 한국 헌정발전사에 있어 영원불멸의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4·19혁명 [四一九革命] (두산백과)
 
수많은 학생들과 일반인들의 희생을 낳은 4.19혁명은 결국 12년간의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이때 185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영혼들이 이곳 ‘국립4.19민주 묘지’에 고이 안장되어있다. 공원 내 가장 위쪽에 위치한 위영보관소는 희생자들의 위패와 영정이 모
▲ 학생들의 사진
셔져 있다. 까까머리에 베레모를 쓴 아직 청춘이라 부르기에 너무 앳된 남학생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보니 00고등학교 3학년 김 아무개. 그 옆에는 귀밑 5센티미터의 단정한 단발머리를 한 세일러 카라의 교복을 입은 어린 여학생. 그들이 무엇을 알았기에 어린 나이에 민주화를 부르짖은 대가로 희생을 당했을까? 우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그들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실천에 옮길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정화 교과서’논란. 다양성이 공존되어야 할 민주주의 사회에서 단일화된 역사 교육이 왠 말인가? 나 같은 일반인도 역사란 하나의 관점으로 접근하여 아이들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칠 수 있는 간단한 기록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획일화된 교과서로 가르치는 건 쉬울지 모르나 훗날 아이들이 과연 어른이 되어 비판된 관점으로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인재가 몇이나 길러 질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4.19혁명으로 희생된 영정속의 어린 학생들이 오늘따라 가슴 한켠이 뭉클하고 영웅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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