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작은 아이 유치원 성탄제 연극 준비로 바쁘게 시작한 달이 어느덧 중반을 지나 달력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2015년도 겨우 한 장 남았다. 모처럼 토요일 오전 한가한 시간. 아이들은 아빠와 공을 차러 나가고, 나는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버스를 타고 내가 즐겨 찾는 그곳으로 향했다. 북한산 자락. 오늘은 어떤 인물과 대면 할 수 있을까? 강북 01번 버스 종점 아카데미 하우스에 내려 둘레길 방향으로 걸었다. 몇 번 와본 터라 이제는 혼자도 낯설지 않은 곳. 나무가 앙상하게 속내를 드러내고 나뭇잎 덮힌 둘레길에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들리는 바스락 소리가 ‘딱딱딱딱’ 오색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와 교묘히 어울려 이 계절에 어울리는 화음을 만들어 낸다. 공기도 참 상쾌하다. 10분쯤 걷다보니 ‘해공 신익희 선생’의 묘역이 나온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선생의 묘역은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 뒤쪽 북한산 자락에 있다. 묘역은 망주석과 문인석, 장명등으로 꾸며져 있으며, 묘 왼편에 ‘해공평산신익희지묘’라고 적힌 묘비가 있다. 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수재로,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만주. 북경. 상해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아보고, 안으로는 민족 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데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 이후 서울에서 제2차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다 일경에 쫓겨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그 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 헌법제정 기초위원 및 임시정부 초대 내무차장, 외무차장, 국무원비서장 등을 지냈다. 광복 이후에는 귀국하여 초대 국회 부의장과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국민 대중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유세활동을 하다가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2012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해공 신익희 선생’의 묘
겨울이지만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선생의 묘지는 잘 정돈된 깔끔함을 보여준다. 잘 정돈됨은 마치 선생의 인품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아무도 보는 사람 없었지만 스스로 몸과 마음이 겸손해 지는 것 같았다.
 
선생의 이야기를 조금 더 알 수 있는 책을 찾아보았다. [해공 신익희 연구] 이 책은해공 신익희를 연구한 책이다.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 건국운동가로서 다채로운 생애를 살았던 해공의 삶을 살펴본다.
 
탁월한 식견과 선 굵은 도량, 해박한 지식으로 정치인들의 존경을 받고, 혁명가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 생을 마친 해공의 삶을 후대에게 전하고자 했다. CEO뿐만 아니라 직장인과 학생들에게도 조직의 결성과 운영 국가관과 인간관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오늘 또 한분의 애국지사를 만나고 내려왔다. 마음 한 구석에 또 하나의 보물이 생 긴 것 같아 부자가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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