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위의 구절은 우리 가족의 교육 철학을 나타내는 논어의 한 글귀로, 배움은 배우는 것에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몸소 익혀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명색이 책을 좋아하는 독서 가족으로써 3.1절 연휴를 맞아 가만히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거창하게는 아니라도 책으로만 배웠던 나라와 역사에 대한 앎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자 의미있는 여행을 고민하던 중, 우리는 민족의 얼과 정기가 서려있는 경주 여행을 2박 3일로 계획하게 되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경주의 찬란함과 안동의 고즈넉함에 도취된 우리는 경주의 마지막 밤을 놓아 주지 못한 채, 결국 “1박 추가!”를 외치며 무려 3박 4일 이라는 기간을 제대로 즐기고 돌아오게 되었지만 말이다.
 
 
교동 최씨, 우리의 정신은 여기에 남는다.
 요 며칠 간 다시 겨울이 찾아온 듯 춥더니 여행을 떠나는 날에는 바깥놀이를 하기에 딱 좋을 정도로 날씨가 풀려 가벼운 차림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바람은 아직 차가웠지만 햇살은 따사로웠고 점차 남쪽을 향해 달릴수록 겨울 내 꽁꽁 언 마음도 포근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5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경주에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교동 최씨 고택이었다.
 
 최씨 고택은 조선시대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구한말 신돌석, 최익현, 김구 등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던 곧은 절개를 지녔던 가문이다. 이들은 진사 이상의 벼슬길에는 오르지 않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않았으며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며, 당시 관직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던 벼슬아치들을 각성시키며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받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고매한 기풍을 지닌 가문이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몰락해갔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고택을 나오면서 최씨 가문의 정신을 이어받은 인물들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많이 나와 사회 약자를 배려하고,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현재는 소실되었지만 원래의 규모가 99칸짜리 대저택이었다는 고택의 규모에 감탄하던 사이 남편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 몇 백 년을 이어온 장인의 손맛을 봐야, 최씨 가문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어?”
 라며 슬쩍 교동 법주를 집어 들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전통 토속명주로 유명한 교동 법주는 최씨 집안에서 대대로 빚어온 법주로, 현재는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 되어 있다고 한다. ‘무형 문화재가 만든 토속주는 어떤 맛일까?’ 궁금함에 한 잔 들이켜 보니, 깨끗하면서도 약간의 단 맛이 버무려진 구수한 맛이 몇 백 년을 이어온 그들의 곧은 정신과 함께 그윽한 향으로 입안에서 맴도는 듯 했다.
 
경주 문화의 정수(精髓) 불국사!
 이튿날 향한 곳은 불국사였다. 경주하면 불국사를 빼 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한국인이라면 학창시절 수학여행으로 한 번 쯤은 다녀온 곳, 그래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곳이 불국사이다.
 불국사는 자연과 인공을 대비시키면서 조화를 추구한 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반적인 사찰의 석축 형태는 일반적으로 돌을 깎아 반듯하게 쌓기 마련인데, 불국사는 ‘그랭이법’을 사용해 자연적인 돌을 기준으로 하고 다른 돌을 그에 맞추는 방식으로 석축을 쌓았다. 비록 자연석의 굴곡에 맞춰 깎기 위해 엄청난 공력과 계산이 들어가야 하지만, 자연을 중시하고 이를 토대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추구하는 불국사의 정신이 단연 돋보이는 부분이다. 게다가 다보탑과 석가탑 사이 간격의 1/2을 단위 기준으로 건물들을 정연한 비례관계로 배치하여, 불국사가 얼마나 정교하고 세밀한 작업을 거쳐 건립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또한 불국사는 기존의 사찰의 형태에 얽매이지 않은 독창적인 구조로 인해 엄청난 축대를 쌓았고, 이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벅찬 감동을 느끼게 했다. 나는 불교를 믿지는 않지만 천상의 세계로 오르게 한다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33개의 계단을 바라보며, 당시 속세와 천상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하는 불국사를 바라보는 불심들의 신성함과 간절함은 자못 대단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석가탑은 수리 중이었기에 볼 수는 없었지만, 책에서만 보던 다보탑을 직접 마주하자 벅찬 감회가 차올랐다. 다보탑을 조각하며 석공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라 불승들은 어떤 염원으로 탑을 바라보았을까... 몇 백 년 전의 유물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노라니... 불현 듯 <책만 보는 바보>(안소영, 보림)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의 마음속에 들어와 나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나눌 수 있다. 옛 사람과 우리가 우리와 먼 훗날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나누며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함께하는 벗이 되리라”
 
 몇 백 년 전의 신라인들과 나, 그리고 나보다 까마득한 후세 사람들이 이 불국사를 바라보며 시공간을 초월해 같은 것을 감정을 느낀다는 것. 경건하면서도 짜릿한 경험이었다. 비록 언제 살았던, 어떤 이름을 가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건 나와 같은 자리에서 수 백 년 전에도, 수 백 년 후에도 내가 느끼는 감정과 진심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 이런 생각을 하며 불국사 앞에서 숙연해졌다.
 
 마지막으로 불국사를 둘러보며 느낀 것은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계단들이 저마다 높고 폭이 좁았다는 것이다. 성인들도 한 달음에 두 계단은 오를 수 없는 높이로 옛날에는 오죽했으랴... 아마도 천상과 이어진다는 불국사의 한 계단 한 계단을 마음을 다해 오르며, 정성을 들여 공덕을 쌓으라는 의미에서 단숨에 오를 수 없는 계단을 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불국사의 정교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었다.
 
 
경주의 밤은 안압지에서 완성된다
 경주의 밤은 안압지에서 절정으로 피어난다. 안압지는 신라 시대의 궁성 연못으로, 근래에는 야경으로 단장하여 안압지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못 아래로 선명하게 비치는 처마와 기둥, 그 옆의 장대한 소나무들이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옛 신라의 달밤에 한 폭의 수채화가 선명하게 물든다. 환상적인 물빛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노라니, 마치 나도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유유자적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아이의 손을 꽉 잡으며 이 기분, 이 분위기를 아이도 느낄 수 있도록 가만히 연못을 응시하고만 싶었지만... 다른 관광객과 마찬가지로 좋은 배경에서 사진을 찍느라 열심히 움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동편>
이리 오너라~ 유교의 바다 속으로
 예정에도 없던 1박을 추가하며 즉흥 여행의 두근거림을 안고 도착한 곳은 바로 안동이었다. 안동하면 유교의 고장, 유서 깊은 전통이 있는 도시로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싶다. 안동은 여타 관광지와는 조금 다르게 펜션이나 리조트가 활성화 되지 않은 대신, 한옥을 개조한 민박이나 게스트 형태의 숙소를 특색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색다르게 한옥에서 머물며 안동의 밤을 기억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지만, 우리에게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안동문화관광단지 부근의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은 깨끗한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요즘 문화관광단지를 조성하느라 여기저기에 새로운 건물들과 호텔들이 들어서 안동은 다소 부산스런 모습이었다.
 
 마침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안동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유교랜드가 그 있어 우리는 자연스레 그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유교랜드는 유교문화를 스토리텔링한 테마파크형 체험 전시센터로 세련된 외관과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며 다양한 체험과 즐길거리, 배움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유교라고 하면 으레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치부하기 쉬우나 타임터널을 통해 16세기 안동의 한 마을에 도착해 선비의 일생을 체험한다는 스토리텔링 형식이 흥미진진했다.
 
 중앙 로비를 가로지르는 인공공포와 터치펜으로 익히는 천자문 퀴즈, 사상의학 제질측정, 말을 타고 적을 무찌르는 스크린 게임, 5D 스크린 영화관까지 최근 가 본 테마파크 중 시설과 내용이 단연 알찼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유교에 대한 이해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다채로운 시설 등과 체험 공간을 통해 ‘즐거운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는 대만족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러한 유교의 정신만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오늘날에 재해석 할 것인지, 어떻게 적용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지향점이 제시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산서원에서 퇴계를 느끼다
 유교랜드를 뒤로 하며 우리는 안동 여행을 온 목적이자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방점을 찍기 위해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1천원 짜리 지폐에서 항상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이지만 정작 그에 대해서는 이기론자, 주리파 정도라는 것 외에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도산서원의 답사는 무엇보다도 퇴계 선생의 삶과 사상을 기리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참뜻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공부를 하는 마음으로 여행에 임하기로 했다.
 
 퇴계 선생이 조선 성리학의 대학자였기에 장원급제로 과거 시험에 붙었을 줄로만 생각했는데, 무려 3번을 실패하고 나서야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세상에 나온 ‘낭중치추(囊中之錐)’가 되고 나서는 조정에서 퇴계 선생을 부르기에 바빴고, 퇴계 선생은 이를 만류하게에 바빴다고 한다. 퇴계 선생은 출세를 하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격의 완성을 위해 공부를 즐겨했다고 한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일본에서 퇴계 선생을 따르는 ‘퇴계파’도 창시되지 않았을까 싶다.
 
 도산서원 앞으로는 낙동강 물줄기가 넓게 펼쳐져 유유히 흐르고, 때마침 저녁 노을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에 정진했을 퇴계를 상상해 보며 이런 공간이 있었기에 그런 심오한 학문의 세계를 탐구하고 확장할 수 있었구나 하고 머리가 끄덕여 진다. 순간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지게 해 주었던, 공부에만 정진할 수 있었던 그의 경제력(부유한 집의 외동딸이었던 첫 째 부인이 남기고 간 재산 덕에 퇴계는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이 고맙고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여행을 마치며...
 이번 경주에서 안동까지의 여행을 통해 옛 조상들의 정신과 문화유산을 둘러보고 나니, 스스로가 한국인이라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으로 마음이 꽉 채워진 듯 했다. 마치 역사(歷史)라는 이름으로 맺어져 있는 옛 사람들과 나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듯 했다. 스스로 마음을 수양하고 나를 돌아볼 줄 알며 타인과 조화롭게 살아가기를 지향한 조상들의 정신을 새기며, 이번 여행을 마무리 하려 한다.
 평소 발길 닿는 대로 여행을 즐기는 여행가들의 흥취와 용기를 부러워만 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계획하지 않은 여행의 짜릿함과 그 여행을 완수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계획되지 않은 여행의 묘미를 맛보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니라 약간의 여유를 갖고 여행지의 매력이 이끄는 데로 발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된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준 소중한 가족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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