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네이버]

새 책에선 종이 냄새와 인쇄과정에서 글자를 박기 위해 사용하는 잉크 냄새가 난다. 요즘은 잉크 냄새가 옛날처럼 심하게 나진
않지만, 새 책을 말할 때 흔히 갓 찍어 채 마르기 전의 향기로운 잉크냄새로 표현하곤 한다. 그것은 책이라는 대상이 주는 지식의 향기로서의 친근한 레토릭(rhetoric)이다.

오-래 된 책에서도 냄새가 난다. 문 없는 책꽂이에 오랫동안
무방비 상태로 놓아두면 먼지와 습기를 흡수하여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게 된다. 숨쉬기 어려울 만큼 습한 냄새를 내 뿜던 내 책들은 3,40년의 세월을 의연히
견디며 아직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느 날 책장을 정리 하려고 책을 모두 꺼내다가,‘흠흠’하며 냄새를 맡았는데 예전에 나던 그
매캐함은 사라지고,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다른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책들을 꺼내 바람이 잘 통하는 거실에 펼쳐 놓았다. 열어 놓은 남향의 유리창으로 살랑대는 바람과 따스한 햇빛이 깊숙이 들어와, 펼쳐 놓은 책을 골고루 어루만지며 생기를 불어 넣어 준다. 몇 십 년 동안 꼭 끼어서 꼼짝도 할 수 없던 책꽂이에서 나와, 한나절 거실에서 한가로이 뒹굴더니 제법 보송보송해졌다. 책갈피를 펼쳐 다시 냄새를 맡아 본다.‘코코아 향기네.’신기해하며 자꾸 맡아 보아도 코코아 향기가 난다. 바람과 햇빛이 그새 마술을 부리고 갔을까. 납작하게 눌려 있던 책갈피는 부풀어 오르고
글자들은 살아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만 같은데, 책에서는 달콤한 코코아 향기가 난다.

생각해 보니 그 냄새의 진원지는 그리움이다. 열 살 무렵, 단발머리를 찰랑대며 시골 책방으로
동화 책 사러 갔던 날의 추억이 배어 있고, 펜팔로 알게 된 청년이 읽어 보라던 책에서는 그와의
인연이 스며있는 열일곱 살의 청순한 여름이 들어 있다. 소월과 바이런, 그리고 학생시집이라는
제목의 시 모음집을 들춰 보며 시를 좋아했던 소녀시절, 그때를 추억한다. 치기어린 마음에 나도
아름다운 시를 써 보겠다고, 그 시를 흉내 내며 모방시를 참 많이도 썼던 그때가 그립다.

요즈음엔 웬만한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소장해 두고 싶은 책은 사서 읽게 되지만, 계속
쌓여가는 책의 엄청난 양을 감당하기 어려워 빌려 읽는데 마침 집 앞에 도서관이 있어 편리하게
이용한다.

그동안 매월 우편으로 배달되는 몇 가지의 수필지와, 귀하게 보내오는 작가들의 수필집을 많이 모아 두었는데, 나 혼자 보고 그냥 꽂아 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정리 하면서 이미 다 읽은 수필잡지와 수필집들을 아파트 경비실 앞, 쉼터에 가져다 놓기로 했다. 꽤 오랫동안 모여서 거의 백여 권이나 되었다. A4용지에‘책 보실 분 가져가세요’라고 크게 써서 쉼터 기둥에 붙여
놓았다. 한꺼번에 내다 놓으면 쓰레기 취급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 같아, 종류별로 분류하여
일주일 단위로 토요일마다 3주에 걸쳐 내 놓았다.‘누가 책을 가져가기나 할까’궁금해서 13층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젊은 여자들도 보이고 가끔 남자들도 책을 들춰 보고 있다. 저녁 늦게 내려가 보니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집에서 잠자고 있던 책들은 다른 이들에게 가서 기지개를 켜고 활개를 치게 될 것이다. 읽고 싶은 사람들이 책을 가져갔을 거라 생각하니 잘한 일이라 여겨져 흐뭇했다.

 오래 된 책의 냄새는 주로 50년대부터 70년대에 출간 된 것들이다. 그리운 것들은 대개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옆에, 내 책장 속에 냄새로 들어 있었다. 책을 꺼낸 김에 다시 읽어보며 그리운
옛날을 펼쳐 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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