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살다보면 때때로 지역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개발에 밀려 사라져 가는 옛것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기록으로 남겨 두는 일이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을 더 망가트리고 없애기 전에 사진과 글로 기록해 두어야 하고, 옛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마을의 노인들이 세상 떠나기 전에 그 기억들을 알아내야한다. 그런 일로 봄부터 가을까지 시간 나는 대로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부터 몇 백 년 전 조선시대의 무덤을 찾아 수풀을 헤치고 다닐 때도 있다. 그런지 십년이 넘었지만 보수를 받는 연구원은 아니다. 어느 날 부턴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찌하다보니 그 일을 하게 되었다. 연구한 것을 논문으로 써서 일 년에 한 번씩 책으로 내지만 학위 논문처럼 전문적인 것은 못되고 어설픈 형식만 취할 뿐이다. 형식이 중요한가, 어설픈 기록이라도 남겨두면 후일 누군가 필요할 때 참고가 될 것이니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역사 강연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올 여름에 3개월 과정의 <고고학 발굴이야기> 문화유산 강좌를 듣게 되었는데, 강의 외에 답사 과정이 들어 있었다. 답사 하는 날 역사의 현장을 찾아 혜음원지로 가는 길을 걸으며 고려청자 파편을 주웠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작고, 3mm 정도로 얇은 청자 조각 하나가 흙 위에서 신비한 푸른색을 띄며 반짝이고 있었다.

혜음원지는 옛 의주로 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위치하는데, 의주로는 조선 시대 9대 간선로 중 가장 중요한 1번 국도로 총 연장 약 1,080리의 교통 통신로이다. 혜음원지 옆을 지나가는 의주로에는 파주에서 서울 쪽으로 높은 고갯길이 있었다. 지금도 고개 이름이 ‘혜음령’인 것은 가까운 곳에 혜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혜음원에 관하여는 ‘동문선(東文選)’ 권 64기에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 기록 되어 있는데, 혜음원 창건배경과 과정,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 등을 기록하고 있다. 혜음사신창기에는 혜음원은 남경과 개성 간을 통행하는 관료 및 백성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 고려 예종 17년인 1122년에 건립된 국립숙박시설로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別院)도 축조 하였다고 전한다.

혜음령은 오랫동안 실전되어 찾을 수 없어, 고려와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통로였던 혜음령이라는 명칭의 유래에서 그 위치를 추정만 하고 있었다. 1999년 주민의 제보로 조사를 하면서 ‘惠蔭院’ 이라 새겨진 암막새를 찾아내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고 지속적으로 발굴 조사 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혜음원지를 왕실, 귀족, 평민 등, 각 계층의 생활양식을 전해주는 유적으로서 고려 전기 건축 및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하였다.

김부식의 ‘혜음원신창기’를 보면, “봉성현에서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허물어진지 오래된 작은 절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석사동이라 불렀다. 서울을 오가는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하여 인적이 끊어질 사이가 없었는데, 산언덕이 깊고 높아 초목이 무성하고 호랑이가 떼로 몰려다니며 사람을 해쳤다. 으슥하고 잠복하기 쉬워 도적떼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해 치고 물건을 빼앗기 일쑤였다. 그래서 고개를 넘을 사람이 많이 모이고 무기를 휴대한 후에 지나가지만 살해를 당하는 자가 1년이면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예종 15년 가을 어느 날, 임금은 남쪽 지방을 시찰하고 돌아온 소천에게 ‘민간의 고통스런 상황을 들은 것이 있느냐.’고 물으니, 산세가 험하여 사람들이 넘어 다니기 어려운 고갯길의 사정을 보고하였다. 임금은 이를 딱하게 여겨, ‘피해를 없게 하여 사람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느냐.’ 고 물었고, 소천은 ‘국가의 재정도 축내지 않고 백성의 노력 동원도 시키지 않고, 중들을 모아 허물어진 집을 새로 건축하고 양민을 모아들여 그 옆에 가옥을 짓고 백성들을 정착시키면, 짐승이나 도둑의 해가 절로 없어질 것이며, 통행자의 난관이 해소될 것.’이라고 하였다. 소천은 임금의 허락을 받고 묘향산에 가서 스님들을 모아 부지런하며 기술이 있는 사람으로, 증여 등 16명을 선발하여 경비를 마련하여 보냈다. 임금께서 중 응제에게 그 일을 맡아 보게 하고 제자인 민청을 부책임자로 삼았다. 절을 다 짓고 난후, 행여 임금이 남쪽으로 행차할 일이 생기면 한 번이라도 머무를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 되어 따로 별원(別院)을 지었는데, 이곳도 아름답고 화려하여 볼만하게 되었다. 혜음사신창기의 기록에 인종이 즉위하여 혜음사(惠陰寺)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하였으니, 별원은 자연히 혜음원이 되었을 것이다. 김부식이 완성된 절과 별원을 보고 감탄하여 표현하기를 ‘아, 깊은 숲속이 깨끗한 집으로 변하였고, 무섭던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으니, 그 이익이 또한 넓지 아니한가. 또한 양곡을 비축하여 놓고 그 이자를 받아서 죽을 쑤어서 여행자에게 공급하던 것이 지금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소천이 이것을 영원히 계속하려 하였더니 정성에 감동된 바 있어 희사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생겼다. 임금께서 이를 들으시고 상당히 후하게 은혜로운 희사를 하시고 왕비(王妃) 임씨(任氏)도 듣고 기뻐하여 말씀하시기를, “그곳에서 실시하는 모든 일은 내가 담당하리라.”하시고, 다 없어져 가는 식량을 보태주시며 파손되어 못쓰게 된 기구를 보충하여 주셨다.’ 하고 소천이 경비에 사용한 것은 모두 위에서 내린 것과 여러 신도들이 보시한 것이다. 그 이름과 목록을 갖추어 후면에 기록한 바와 같다. 때는 갑자년 봄 2월, 일에 기(記)를 쓴다. 고 기록 하였다.

지금 혜음원지는 계속 발굴 하는 중인데, 그 규모가 상당하다. 처음 발견했을 당시 기와가 우르르 무너진 모양대로 있었고, 주방에서 쓰던 그릇들도 한꺼번에 떨어진 채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혜음원은 불이 났었거나 어떤 변란에 의해 쓰러진 것으로 추측한다. 깨지지 않고 성한 모양대로 있는 것도 있었다는데, 나는 청자 파편 한 조각 주워 들고 역사를 들여다본다.

고고학 발굴이야기 수업을 들으며 ‘역사(시간)는 공간에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과 공간의 의미에서 ‘시간은 공간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가 아닌가. 지금 이 순간의 공간에는 시간을 거쳐 인간이 살아 온 물리적 축적과, 정신적 축적인 역사의 축적이 함께한다. 시간을 넘어 공간에 남겨진 흔적인 청자 파편이 내 손 위에서 역사의 행간으로 남아 나를 매료 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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