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한 순간 호흡이 멎는 듯, 사진을 든 손이 바르르 떨리는 듯, 시선이 정지 된다.

“내 청춘이 이렇게 어여쁜 모습이었네.”

사진 속 내 모습에 홀려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상자 속에 차곡차곡 눌려 있던 사진들을 꺼내 놓자 지난 세월이 화들짝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바닥에 펼쳐진 사진 속에는, 세월 저 너머에 살고 있는 젊은 여자와 그의 동인들이 온갖 멋을 내며 해 맑게 웃고 있다.

30여 년의 파주문학회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인터넷 카페에 정리해 두려는 참이다. 파주문학회는 1989년부터 시작했고, 인터넷 카페는 2005년에 만들었다.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고 부터는 동인지 출간기념회와 문학기행, 또는 동인들의 일상의 모습을 그때그때 바로 카페에 저장해 두었지만, 그 이전의 사진은 모두 종이 사진으로 상자 속에 넣어 둔 채 잊고 지냈다.

마구 뒤 섞여 있는 사진을 순서대로 정리하려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수 없이 들여다보며, 언제 무슨 행사, 몇 년도에 어디로 갔던 문학기행, 동인지 출간 기념식에서 축제처럼 춤추고 노래하던 장면 등, 수많은 사진 중에서 비슷한 사진은 골라내고 필요한 것만 추렸는데도 3백여 장이나 된다. 그렇게 정리한 사진을 디지털 카메라로 다시 찍는다. 스캔하면 간단하지만 스캔 복합기가 없으니 어쩌겠나. 잘 나온 사진이 필요한 게 아니고, 역사를 기록해 두려는 것이니 이렇게라도 할 수 밖에 없다.

사진을 정리하고 찍으면서 한 동안 팔팔한 젊음에 빠져 지냈다.

“조 개미허리 좀 봐.”

“에고~ 저 날렵한 턱선 좀 봐.”

돼지허리인지 드럼통인지 알 수 없는 지금의 내 모습에 비하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워 보여서 자꾸만 중얼 거린다. 팔팔한 젊음이라고 했지만 사진 속 모습은 20대가 아니고 40대 전후, 예전 같으면 중년이라고 부를 나이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때가 푸르렀던 날들이다. 새싹 돋는 이른 봄이 지나고, 막 봄에서 여름으로 가려는 계절, 꽃이 만발하고 풀이 무성해지려는 때이다. 튼튼한 몸과 탱탱한 피부와 번쩍이는 광채로 타오르던 눈빛을 가진 젊음은 없지만, 미숙함을 벗어버린 완숙미와 안정된 모습이다. 사랑이나 이상이 어찌 청춘에게만 있겠는가. 청춘에서 조금 비껴 났다고 사랑도 꿈도 욕망도 비껴 가버린 건 아니다. 마흔 살이었던 그때도 자연이 주는 감성에 흔들리며 하늘과 구름과 바람, 숲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의 열락에 떨렸었지. 아니, 지금도 여전히 두근대는 가슴으로 산다.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요정의 마술에 걸린 공주가 탑 속에서 잠이 들자, 성안의 모든 사람과 동물, 새와 나무와 풀까지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이웃나라 왕자가 찾아와 공주의 입술에 키스를 하자 공주와 함께 만물이 깨어났다. 동화처럼 지금 내 무릎위에 놓인 상자 속에서도 마술이 벌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세월이 화르르 깨어나 내 머릿속에 동영상으로 재현 되고 있는 것이다.

옛날이 그리운 건 자꾸만 달아나는 세월이 아쉬워서일 터이다. 시인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을 노래하노라면, 저만치 밀쳐 두었던 외로움이 어느 결에 슬그머니 옆에 와 있는 듯 쓸쓸함에 젖는다. 시인은, 사랑하는 이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가슴에 남아 있다고 했다. 그의 가슴에 남은 순결했던 청춘의 기억. 나뭇잎에 덮여서 흙으로 사라진 사랑이지만,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한다. 그가 그리워한 건, 눈동자와 입술과 가로등 밑 그늘의 밤으로 상징되는, 사라지는 청춘의 어느 한 때였으리.

사진 속 젊은 날의 사람들, 판타지 영화 속에서라면 몇 세대를 뛰어 내려가 만날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 우주의 질서는 정해진 이치에서 거스를 수 없으니 우주의 법칙대로 살 일이다. ‘리듬분석’의 작가 ‘앙리 르페브르’는 그의 글에서 ‘<계단은 단순히 A공간에서 B공간을 연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간과 리듬을 연결해주는 미디어다. 계단은 하나의 리듬에서 또 다른 리듬으로 옮아가는 통로이자 서로 다른 리듬들이 전환되는 컨버터이기도 하다.>’ 라고 했다. 나이를 먹어 가는 것도 계단을 오르는 과정으로 보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한 계단 뛰어 오를 때마다, 각기 다른 시간과 시간 사이를 리드미컬하게 넘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 카페에서 파주문학회 역사를 년대 순으로 정리하는 동안, 작업하는 시간엔 꼼짝없이 과거에 사로잡혀 살았다. 나갈 일이 있어서 머리를 손질하거나 화장을 할 때 외에는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으려 거울도 보지 않았다.

드디어 모든 작업이 끝난 날, 과거로의 시간 여행에서 돌아 와, 그제야 거울 속의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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