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유적지 답사를 떠났던 8월 초는 중국에도 더위가 한창인 때이었다.

더위에 시달리며 일주일간 요하문명(遼河文明)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본 것은, 기원전 4,000년~2,500년경 사람들이 살던 집단 주거지와 각종 부장품을 발굴한 후에 흙으로 덮어 둔 흔적이다. 광활한 땅 이곳저곳에 있는 고조선 유적지를 찾아 가는 길은, 두 세 시간을 달려가서 잠깐 보고 또 다시 몇 시간을 달려가야 하는 길이다.

버스를 타고 길 위에서 만나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은, 지구의 한 귀퉁이 선한 사람들이 숨 쉬는 여유로운 풍경이다. 시내를 벗어나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뿐이어서, 세상에 인간이 먹는 식물은 오직 옥수수 밖에 없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여기저기 옥수수 잎들이 일제히 바람에 휘둘려 “솨~” 소리를 내며 물결치듯 춤을 춘다. 밭 옆으로는 느릿느릿 노새를 타고 가는 농부의 모습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옥수수와 노새를 본 것은 처음이다. 노새는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엉덩이에서 커다란 덩어리를 툭툭 떨어트리기도 하는데, 목적지를 향해서 바쁘게 달려가는 버스와 들판의 한가한 풍경이 대조적이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룬다. 어쩌면 권태롭기까지 한 그 풍경은 우리가 떠나온 현대의 바쁜 일상과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어서, 신석기시대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저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옥수수 밭을 지나 3시간을 달려 간 곳은. 지금의 요녕성 부근에 있는 내 몽고 지역의 ‘동산취’ 제단이었. 옥수수 밭 가운데로 조금 올라가니 넓은 터가 있었다. 이곳에서 1979년에 대형 제단 유적인 ‘동산취유적’이 발견되어 주변지역에 대한 지표조사가 시작되었고, ‘동산취’에 이어서 50km 떨어진 ‘우하량 유적에서는 기원전 3500~2500년경의 대형제단과 여신묘(女神廟)와 적석총군(積石塚群)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유물과 제단, 여신묘, 적석총의 형태로 보아 그 당시에 이미 계급사회로 들어섰고,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진 ‘초기국가’ 단계의 모든 조건을 갖춘 문명사회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 이곳까지 온 우리는 왜 이곳을 고조선 역사유적으로 보는가. 그것은 중국 문명에는 없고 한반도에서만 볼 수 있는, 빗살무늬토기와 비파형동검 적석총 등이 발굴되었으며, 여러 경로의 역사적 고찰과 조사에 의하여 단군이 나라를 세웠던 고조선이 있던 지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적석총은 요동반도와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우리민족 고유의 장묘형식이다. 우하량 유적에서 발굴된 여신이 혹시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은, 발굴된 유물들의 연대가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기원전 2,333년과 비슷한 시기이며 지역 또한 고조선이 있던 일대이기 때문이다.

‘여신묘’로 올라가는 계곡에서 흙으로 빚은 코를 발굴하였는데, 나중에 그 아래 지점에서 코가 없는 여신의 얼굴을 발견하여 떨어진 코를 얼굴에 맞추었더니 꼭 들어맞았다. 흙으로 빚은 형상이 5,000여 년 동안의 풍상을 견디어 내고 서로 짝을 이루었으니, 각각 다른 곳에서 이날을 기다려 온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단군을 우리나라의 시조라고 하면서도 신화로 여겨왔다. 그러나 신화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있었던 어떤 사실을 상징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고대인들의 삶과 역사 그리고 사회와 자연에 대해 그 시대의 논리체계로 전해 내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가 일어나기 전, 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삶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나 물건을 신격화하는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이 있었다. 고조선이 국가를 이루기 전에는 그 지역에서 호랑이를 숭배하는 호랑이족과 곰을 숭배하는 곰족이 서로 싸우다가 곰족이 이기게 되고, 다른 곳에서 유입되어 온 환인집단의 환웅과 곰족의 웅녀가 짝을 이루어 단군 ‘왕검’을 낳아 고조선을 세웠다. 이것이 쑥과 마늘에 얽힌 곰과 호랑이이야기이고, 하늘에서 내려 온 환웅과 웅녀가 결합한 단군신화의 해석이며 고조선의 역사이다. 우하량 ‘여신묘’ 유적지에서 발굴된 동물 조각에는 용과 돼지의 형상이 있었고, 제단 터에서는 제사에 사용된 곰의 아래턱뼈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부장된 옥기들 중에 돼지 형상으로 보고 옥저룡(玉猪龍)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곰의 형상에 더 가까워 지금은 옥웅룡(玉熊龍)으로 보고 있고, 그 지역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곰을 숭상했던 민족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동안 방영되었던 드라마 <태왕 사신기>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얘기를 다루었는데, 단군신화와 연결시켜 판타지 드라마로 만들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제정일치시대였던 그때는, 제사를 맡고 있는 여사제(女司祭)가 왕과 같거나 비슷한 위치였다. 여사제는 여신을 대신한다고 볼 수 있는데, 여신은 모계사회를 의미할 수도 있고 만물의 근원이 모태로부터 생겨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지난 여행에서는 여신묘를 답사하는 것이 일정에 들어 있지 않아 못 보았는데 다음번 여행에서는 꼭 가봐야겠다. 사실 가 본댔자 발굴하고 덮어 둔 터만 보게 되겠지만, 역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동안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염제와 황제의 자손이라는 의미의 염황지손(炎黃之孫)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중화삼조당을 지어 놓고 염제, 황제와 함께 동이족의 왕이었던 치우(蚩尤) 상까지 만들어 중화민족의 세 조상으로 받들고 있다. 원래 그들은 치우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으나, 한국인들이 치우를 민족의 조상으로 높이려하자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전쟁인 탁록대전에서 치우와 싸워 패배했던 아픈 역사의 인물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여 우리를 중국의 부족국가로 전락 시켜 버리려 하고 있다.

치우천왕이 차지했던 영토, 단군이 지배했던 고조선, 광개토대왕이 넓혔던 광활한 땅을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역사만은 되찾아 잃었던 고지도의 영토를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조상들에게는 낯이 서지 않는 일이고, 후손들에게는 더 큰 짐을 물려주는 결과이다. 중국이 5,000~6,000년 전의 요하문명을 조사하고 발굴해 그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고구려사 왜곡은 동북공정의 일부분에 불과하고 우리의 역사 전체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것이다.

고조선 지역에서 발굴한 유물은 박물관으로 모두 가져가고 터만 남은 유적지를, 중국 공안원들이 지키며 한국 관광객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곳도 있다. 길가에 버스를 세워 놓고 적석총을 보러 가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구덩이에 돌널로 만든 석곽묘가 들어 있는 적석총을 보고 모두들 흥분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지키고 있던 공안원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잡히면 1인당 벌금이 상당하다는 인솔자의 말에 모두들 비를 맞으며 버스를 향해 뛰었다. 버스에 타고는 30여명의 사람들이 붙잡히지 않았으니 돈 벌었다고 웃으며 씁쓸해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옛 영토를 볼 수 있어서 행복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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