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을 이겨내고 시작하는 여린 봄처럼 잔잔한 문장들이 돋보이는 신간들이 나오고 있다. 섬세하게 엮어진 단단한 문장들을 읽다보면 겨울 내 얼어붙었던 몸이 풀어질 것 같다.

 

◆ 사랑에 대한 어른 동화, 정호승의 ‘못자국’

 

쉽게 말하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단어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아프고, 사랑해서 괴롭고, 사랑이 있기에 방황하며, 사랑이 너무나 멀어 메마른 존재들이 결국 또 사랑을 통해서 성장한다.

 

2010년 출간한 ‘의자’의 개정판인 ‘못자국’은 ‘사랑’의 변두리를 오가고 관통하는 24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표제작 ‘못자국’은 감나무에 박히는 못이 주인공인 글이다.

 

사랑스런 외동아들을 잃은 남편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귀가가 늦어지고 폭음과 외박이 이어진다. 아내는 그럴 때 마다 감나무에 못을 박았다. 이렇게 박힌 못은 계속 늘어만 갔다.

 

어느 날, 아내는 외박하고 돌아온 남편을 감나무로 이끌었다. 많은 못이 박힌 감나무를 본 남편은 자신이 아내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었음을 깨닫고 예전처럼 돌아갔다. 그 후 아내는 남편이 자상하게 대해줄때마다 못을 다시 뺐다. 어느 날 못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못자국은 남아 있었다.

 

◆ 잡히지 않지만 뚜렷한... 이제니의 ‘있지도 않는 문장은 아름답고’

 

출판사 현대문학의 새로운 한국 문학 시리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세 번째 컬렉션이 출간됐다. 이제니의 ‘있지도 않는 문장은 아름답고’에는 26편의 시와 에세이가 담겨있다. 표지는 설치와 조각을 주로 하는 구현모 작가의 매혹적인 드로잉 작품이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세 번째 컬렉션은 이제니 외에 신용목, 황유원, 안희연, 김상혁, 백은선 등 한국 시 문학에서 주목받는 시인들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시인 특유의 투명한 언어로 매니아 적인 독자층을 갖고 있는 이제니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발군의 언어 감각을 보인다. 중력의 힘을 받지 않는 듯한 무의 공간에서 언어가 엮이고 방향이 없던 문장들에 의외의 의미들이 입혀지는 시적 과정 자체를 한 편 한 편의 시로 그려낸다.

 

“아직 쓰이지 않은 종이는 흐릿한 혼란과 완전한 고독과 반복되는 무질서를 받아들인다. 손가락은 망설인다. 손가락은 서성인다.”(‘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부분)

 

“모나미는 우리들의 정다운 벗. 모나미는 153 들판의 푸르른 언니. (…) 모나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회전식 슬픔. 모나미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원주율 감정.”(‘모나미는 모나미’ 부분)

 

시인의 기억하는 여섯 살 무렵의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도 담겨있다.

 

“나는 오늘도 낱말을 고른다. 뒤늦게 다시 도착하고 있는 그 모든 얼굴들에 대해 그 모든 목소리들에 대해 무언가를 밝히기 위해서 단어들을 고르고 고른다. 그러나 어떤 얼굴들 앞에서는. 어떤 시간들 앞에서는. 언어를 고르는 것 자체가 죄악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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