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도 소통이 되나요?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이 시간을 통과하려 애쓰고 있다"

“난 너와 다시 연락하고 싶어. 친구처럼 지내고 싶고.
또 난 너와 다시는 연락하고 싶지 않아. 친구처럼도
지내고 싶지 않고. 어떻게 하면 너와 연락하고 친구로
지내기 위해 연락하고 싶지 않은 이유와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은 이유를 없앨 수 있을까?”_ p. 135

▲ 정용준 (지은이)/arte(아르테)


소설의 말미에서 윤기가 무주에게 전하는 ‘연락하고 싶고 친구로 지내고 싶은 마음’과 ‘연락하고 싶지 않고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서로 반대의 마음이기 때문에 한 가지를 버려야 한 가지를 취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둘은 붙어 있으므로 한 가지를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흔들리고 말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녹록지 않은 것은 이러한 삶의 모순 때문이 아닐까. 삶에서 이러한 불가능한 것들을 찾아내, 그것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살펴, 생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결국 문학의 일일지 모른다.


‘이별’과 ‘작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각별히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용준은 ‘이별’이 같은 세계의 양 끝을 향해 걸어가는 거라면 ‘작별’은 각각 다른 세계로 걸어가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다소 모호하게도 여겨지는 이 말은 작별(作別)의 한자를 떠올려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여 ‘이별’을 ‘작별’로 바꾸고 싶은 사람의 마음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작별’을 ‘이별’로 바꾸려 애쓰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작가의 고백은, 마침내 ‘작별’을 ‘이별’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한 은유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헤어진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작은 책상에 앉아 혼자만 펼칠 수 있는 책 한 권을 갖는 일”인지 모른다. 다른 세계로 건너가 혼자 간직한 헤어짐은 영영 공유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완전한 소통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은 어쩌면 끝내 풀리지 않은 채 오래된 숙제로 남을지 모른다. 문학이 그것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장이라면, 정용준은 선두에 서서 그 실험을 성실히 행하는 연구자라 할 만하다. ‘세계의 호수’가 실은 ‘세 개의 호수’임을, 잘못된 소통으로 만들어진 허상임을 알게 되더라도 그 ‘세계의 호수’에 가고자 하는 이가 바로 정용준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한국독서교육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