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가을은 하늘 높고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 ‘가을에는 죽은 송장도 꿈지럭거린다.’는 옛 속담처럼 더운 여름날을 보내고 역동적이고 분주하며 바쁜 계절이다. 풍요로운 계절이고, 온갖 과일과 곡식이 익어가는 추수의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 식은 밥이 봄 양식이다.’라고 하여 봄과 대비되는 행복하고 즐거운 계절이다. 더불어 낙엽이 떨어지고 인생을 정리하며, 추위와 스산함이 가득한 겨울을 준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 김홍국 컬럼리스트(경기대 겸임교수)

우리 전통을 담은 ‘농가월령가’에서는 가을에 하는 일로 김매기·벌초하기·김장채소가꾸기·베짜기·면화·고추따기·과일장만하기·타작하기·기름짜기·방아찧기 등을 예시하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농사일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을에는 목화밭의 풍경을 백설 같다고 묘사했고 고추를 널어 말리는 모습이 산호 같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 국화·목화·단풍·낙엽 등의 식물과 기러기·귀뚜라미 등의 동물, 달·바람·비·하늘과 같은 자연 현상이나 추석 같은 세시풍속과 바쁜 농사일 등이 주로 등장하곤 했다. 서리를 맞아가며 피는 국화에서 오상고절(傲霜孤節), 목화나 단풍의 풍광에서 나타나는 조화롭고 아름다운 빛깔은 우리 금수강산의 절경과 풍요로움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선조들은 민요를 통해 “잎이 지고 서리치니 국추 단풍 시절인가. 낙목한천 찬바람에 홀로 피는 저 국화는 오상고절이 되어 있고……”, “꽃아 꽃아 국화꽃아 삼춘가절 다 버리고 구추중앙 기다리어 찬이슬과 찬서리에 반갑듯이 홀로 피네. 능상고절 장한 기상 화중군자 국화로다.”, “영창밖에 국화 피어 국화 밑에 술 빚어 놓으니, 국화 피자 술이 익자 달이 돋자 임 오셨네……”, “비 맞으며 국화뿌리 분에다 옮겨 심고 물을 주며 잘 가꾸어 구월이라 서리올 제 술잔이라 향기 띄워 취하도록 마시리라……”와 같은 표현을 통해 국화의 아름다움과 풍류 및 낭만을 노래하곤 했다.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다.

 

가을이면 선비들은 낭만과 우수에 젖어들곤 했다. 신라 때 최치원은 <추야우중(秋夜雨中)>에서 “가을 바람에 다만 괴로이 시를 짓나니, 세상에는 내 시를 아는 이 적다. 창 밖에는 한밤에 비가 내리고, 등불 앞에 도사린 나그네 심사(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라며 외로움과 쓸쓸함을 드러냈고, 송강 정철은 <산사야우(山寺夜雨)>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 성글은 빗방울로 그릇 알고서, 중 불러지게 바깥 나가 보라 했더니 시냇가 나뭇가지에 달이 걸려 있다네(蕭蕭落木聲 錯認爲踈雨 呼僧出門看 月掛溪南樹).”라는 표현으로 낙엽이 지는 소리를 묘사하는 절창을 담아냈다. 오죽하면 성웅 이순신 장군마저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에서 “바다에 가을이 저무니 기러기 떼 높이 날아가네. 밤새 시름으로 뒤척이니 새벽달이 활과 칼에 어려라(水國秋光暮 驚寒雁陣高 憂心轉轉夜 殘月照弓刀).”라는 표현으로 장수로서의 우국충정을 가을의 이미지에 실어 표현했을까. 시인 오세영의 ‘시월’은 그래서 이같은 가을의 이미지를 그리움과 외로움, 이별을 통해 살아가는 우리들의 세상살이를 잘 표현했다.

 

시월 / 오세영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어려움과 시련도 많은 시대에 이를 헤쳐나갈 지혜와 해법을 책을 통해 얻어보면 어떨까? 인류의 경험과 지혜를 담은 수많은 책을 벗삼아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가는 의연함과 당당함이 필요한 시대다. 김현승 시인은 시 ‘희망이라는 것’에서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상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거리의 노을을 벗기지만 않으면….”이라고 노래했다.

 

우리에게 희망을 건네는 독서의 힘은 그래서 강력하다. 영국의 작가이자 시인인 골드 스미스는 “양서는 처음 읽을 때는 새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전에 정독한 책을 다시 읽을 때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 같다”고 말했고,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육체와 같다”고 독서의 힘을 강조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내가 세계를 알게 된 것은 책에 의해서였다.”고 책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세계적인 투자가 워런 버핏은 “당신은 독서보다 더 위대한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독서의 힘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눈물과 보석과 별의 시인’으로 불리는 김현승(1913~1975) 시인은 한국 시단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 시인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으며, 맑고 밝고 선명한 이미지들을 통해 정신의 명증성과 함께 높은 종교적 윤리성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준 시인으로 유명하다. 서구 기독교의 오랜 전통인 청결한 윤리의식과 한국의 지조와 절개를 중히 여기는 선비정신이 혼합돼 독특한 정신주의를 구현한 김현승 시인은 절대자와 고독한 인간과의 대화, 문명적인 시대상황, 사랑‧신앙‧고독 등을 통해 고독을 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시키고 사회비판적 시 정신의 바탕으로 삼게한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이 가을, ‘절대고독’을 추구했던 김현승 시인의 가을 시 두 편을 읽고, 그의 시를 찾아읽어보면 어떨까? 우리의 영혼과 문학적 감성을 바탕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의미와 역사성, 문명과 신화, 사랑과 우수의 가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가을 /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저작권자 © 한국독서교육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