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계와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군 영화가 있었다. [나랏말싸미]라는 영화는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뒤엎은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한 때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라는 광고 때문에 초등학생들이 시험을 보면서 침대를 가구가 아닌 것으로 표시해서 성적에 영향을 주었다는 웃지 못할 헤프닝이 있었다. 4차산업혁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미디어는 상당한 영향력을 과시한다. 가짜뉴스를 통해 왜곡된 진실을 재생산하여 확대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처럼 세종대왕과 승려가 만나 지금의 한글을 만들었다는 구전동화도 아니며 야사도 아닌 것이, 웃픈 한글의 역사를 만들어 스스로 먹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민족의 언어는 훈민정음이 나오기 전까지 중국의 속국이었으며, 양반들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양반 자녀들만 한자를 배울 수 있었고, 그들에게만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소위 양반들만 한자를 배울 수 있었으며 이것은 그들만의 명예와 부의 상징처럼 여겼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자주 도성 밖을 돌며 그들의 삶에 관심과 애정이 많았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사또에게 정확하게 전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백성이면 누구나 다 쉽게 편하게 말과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고 싶은 세종대왕, 가장 먼저 백성을 사랑했던 애민정신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란다.

 

애민정신을 담은 한글은 언어의 본질인 사랑을 품고 있다. 백성이 느끼는 삶의 희노애락을 함께 느끼고 공감하고 싶었던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중국의 압박, 양반들의 온갖 방해와 음모, ‘언어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회적 패러다임과 기나긴 싸움을 해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천한 백성들이 사용한다 하여 ‘언문’이라 부르며 비천한 글로 취급받아야 했다. 긴 역사 속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오면서 한글 창제의 과학적 원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서 ‘한글의 우수성’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모든 언어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인 한글은 더 이상 역사적이든 문학적이든 왜곡되지 않아야 한다.

 

언어는 그 사람의 인성을 표현하는 인격체와 같다. 자신이 표현하는 말고 행동, 특히 말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다. 오해도 사랑을 담고 있는 말이면 풀 수 있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처럼 진심 어린 사랑이 담겨 있으면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다. 한글의 탄생에는 애민정신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언어의 본질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왕이 백성을 사랑했듯이, 백성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언어를 준 셈이다. 한글날 573년을 맞이하여 우리 스스로 자신이 사용하는 표현에 사랑을 담고 있는지 돌아보기 바란다. 한글 사랑은 자신의 말을 가꾸고 다듬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인격을 표현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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