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아니면 2004년 9월 어느 날, 이대역 3번 출구. 과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노트와 필기도구, 교재를 넣은 플라스틱 파일 상자를 양손으로 품에 안고 지하철역을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휙 바람이 불며 내 머리카락이 넘어갔다. 그 바람에 고개를 들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 가을 향기!’

  그해, 한창 무덥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음을 그날 그 순간에 알아차렸다. 그날 이후로 습관이 생겼다. 올해 첫 가을 향기 나는 날 찾기. 아쉽게도 올해는 그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지난주 수필 주제로 ‘가을 하면 생각나는 것’이라고 썼다가 지웠다. ‘첫째, 둘째’ 써가며 나열하는 글쓰기를 해오는 아이들이 많아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다급하게 알림장을 지우며 이런 말을 했더니 맞는 말이라고 동조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제 아이들의 글 쓰는 수준이 제법 높아진 게 분명했다. ‘가을 날씨가 좋은 이유, 또는 싫은 이유’를 주제로 정했다. 한두 가지 이유를 자세히 풀어쓰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똑같은 나열하는 글쓰기라도 사물을 열거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느낌을 찾아보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글을 받고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참 잘 썼다.

  하연이는 착하다. 너무 밋밋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정말로 ‘착하다’로 표현할 수 있는 아이다. 매사 최선을 다한다. 교실에서 하나씩 맡은 일인일역도,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청소도, 수업 시간에 내주는 과제도 정말 열심히 한다. 안경 낀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업 시간 내내 집중하고, 6학년들이 잘 하지 않는 대답도, 발표도 참 잘한다. 착한 하연이가 정말 잘하는 건 역시나 숙제다. 개요 짜는 데에 도움이 될까 싶어 마인드맵 프로그램을 알려줬더니, 잘 새겨들었다가 그 프로그램으로 개요를 짜서 수필과 함께 올리는 정성을 보였다. 글쓰기 실력이 날로 일취월장하는데, 그건 전부 하연이의 성실함이 이뤄낸 결과이다.

  아이들 글이 기사로 올라오니 아직 자기 차례가 되지 않은 아이들이 조금 다급해지나 보다. 하연이도 자기 글은 언제 올라오냐고 학급 SNS에 댓글을 달았다. 처음부터 번호대로 올려주다 보니 여자 끝번인 하연이 차례는 한참 멀었다. “글쎄….” 했다가 하연이 수필을 읽고서는 바로 이번 기사에 올릴 글로 골랐다. 글을 잘 쓰기도 했고, 문단마다 소제목을 붙인 정성도 갸륵하다. 특히 마지막 문단에 붙인 소제목이 인상 깊다. 이 아이들과 헤어질 날도 몇 달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내 마음도 찡해졌다.

 

단풍잎이 피기 전에(전하연)

1. 가을이 시작됐다.

드디어 10월이다. 봄과 여름이 지나고 싸늘한 가을이 왔다. 가을은 단풍잎이 물들 때가 좋다. 아무도 느끼지 않는 가을의 향기를 누가 알까? 가을이 시작되면 나는 산에 올라가서 둘레길을 걷고 싶다. 가을이 시작되면 산에 올라가서 둘레길을 걸을 것이다.

2. 서늘하다.

학교에 갈 때 바람이 불어오면 왠지 나도 모르게 온몸이 추워진다. 나는 서늘한 가을 날씨가 좋다. 서늘한 날씨가 여름에 부는 바람보다 더 좋기 때문이다. 서늘한 느낌은 직접 보고 느껴야 되는 것이다. 하루는 옷을 입을 때 어느 정도 추운지 알아보려고 창문을 열고 한 5분 정도 서 있었다.

3. 딱 좋은 날씨.

주연이랑 같이 옷을 맞춰 입을 때나 내 기분에 미쳐있을 때나 언제나 가을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가을은 하늘만 봐도 딱 느낌이 온다. 어떤 옷을 입고가도 나는 연한 분홍색 후드 잠바는 언제나 학교 갈 때 빼놓지 않는 잠바이다. 너무 눈에 띄긴 하지만 나는 그 후드 잠바가 마음에 든다. '오늘은 딱 좋은 날씨다.'라는 생각이 들 때는 가을밖에 없다.

4. 내 감기를 낫게 해준 가을.

나는 감기가 거의 약 1달 동안 이어져 왔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먹으니 약의 효과가 나오기 시작해서 4일 만에 나았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인 것 같다. 영화 '사자'에서 신부님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뜻이라고 했다. 그러니 내 감기를 낫게 해준 것도 주님의 뜻이라고 할 수가 있다.

5. 노랗게 물든 은행과 단풍잎이 피기 전.

은행은 이미 폈고 단풍만 남았다. 은행은 냄새가 고약하지만 속은 아주 따뜻할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얼굴은 예쁘지만, 마음이 나쁘면 결국엔 그 사람은 인생을 망치는 것과 같다. 단풍잎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피기 전이 가장 예쁘다. 아직은 단풍에도 시간이 있다. 더 빨갛게 물들 수 있는 시간이….

6. 가을이 좋다.

나는 가을이 좋다. 가을의 단풍잎과 은행을 보기만 해도 다음 날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가을은 날이 맑아야 더 좋은 법이다. 날이 좋지 않으면 기분도 좋지 않고 불안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날이 좋지 않으면 기분도 좋지 않고 불안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가을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7. 아무나 하지 못하는 나의 일을 도와준다.

나는 가끔 계절이 나를 도와주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하늘을 본다. 그러면 나한테 "괜찮아, 다 잘될 거야."라고 말을 해주는 것 같다.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다 하는 것 같다. 다 내가 생각을 하고 만들고 하는 것 같다. 오늘 하루도 기분 좋게 보내자! 날이 좋지 않으면 기분도 좋지 않고 불안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가을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8. 내 6학년의 마지막 가을향기.

이것이 바로 나의 마지막의 가을인 것 같다. 이제 내년이면 중학생이니 이번 가을은 실컷 즐겨야겠다. 가을향기도 내년처럼 이어졌으면 좋겠다. 하루만이라도 가을이 하루 앞당겨 졌으면 좋겠다. 지금이 가장 좋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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