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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파인더신간도서
[신간]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 당신이 모르는,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내가 퀴어라는 걸 사람들이 모르잖아요. 그게 바로 차별이죠”
고혜미 기자  |  ad208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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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12  11: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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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성애’ 규범이 외면하고 추방한 존재,
성소수자 노동자가 바라본 차별 가득한 일터의 민낯


우리가 모르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 성소수자들의 노동을 추적한 르포.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 규범이 지배적인 일터에서 성소수자들은 어떻게 노동하고 또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가 우리와 다른 존재라고 선 그은 이들이 정말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다양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삶과 죽음을 기록해온 기록노동자 희정이 이번에는 성소수자 노동자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이들은 사무실, 카페, 학교, 학원, 콜센터, 공공기관, 시민단체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고,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에서 벗어난 정체성을 가지고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사회와 불화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쩔 수 없이 숨기면서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성소수자들만의 노동’이 아닌 ‘지금 이 사회의 노동’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고단함에는 접점이 있다. 취업의 문턱과 직장에서 우리가 받아온 모욕과 성소수자들이 받아온 모욕이 다르면서도 같다는 점을 이 책은 말한다.

   
▲ 희정 (지은이)/오월의봄


누구도 가던 걸음을 멈춰 뒤돌아보지 않도록, ‘그들처럼’ 보이는 일
성소수자들은 출생 직후 의료 기관이 내린 성별 판단인 지정성별과 자신이 이끌리는 성적지향 간의 불일치 속에서 살아간다. 사회가 지정한 성별과 스스로 표현하고자 하는 성별이 다른데, 그 ‘다름’을 사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정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삶은 가혹하다.
결국 직장을 다니는 성소수자들에게 가장 중대한 일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것이다. 소위 ‘패싱passing’이라고 하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외양과 행동을 위장하는 일. 이들은 직장이라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다. 그래서 이들은 각본을 필요로 한다. 그 연기는 ‘그저 연기’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되는 행위다. 애인 유무와 결혼/출산 계획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직장에서 성소수자들은 내일 당장 없어질지도 모를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기한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는 ‘이성애 각본’이 너무나도 당연한 직장에서 이들은 자신의 진짜 애인을 이야기하는 대신, 가짜로 꾸며낸 ‘애인 캐릭터’의 정보를 읊는다.
“직장에서 이야기할 때 강표는 애인의 성별은 물론이고 나이까지 거짓으로 말한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연하 남성과 연상 여성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성 커플의 경우에는, 화장품을 같이 쓰고 있다거나 여자대학에서 만났다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조금 더 철저하고 싶다면 가상의 남자친구가 나온 군부대 명까지 정해두는 준비성을 보인다.”
완벽한 거짓말을 위해선 훨씬 더 섬세한 지문과 대사가 필요하다. 이 ‘치밀하고 섬세한 각본’은 참을 수 없이 버겁다. “사람들이 의심할 틈 없게 끊임없이 이성애자인 척”해야 하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피곤한 일이다. 집에 돌아와 낮에 동료들에게 한 말을 자꾸 되짚어본다. 혹시라도 실수가 있진 않았는지, 늘 염려한다. 만약 이 각본을 던져버린다면? 대가는 작지 않다. 정식 직업을 포기한 채 단기 일자리를 전전해야 하고, ‘구직이 일상’인 삶을 이어가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의 직장을 포기해야만 한다.

세상이 네모인데, 당신도 네모입니까?
세상은 남자와 여자가 맺어지는 일을 ‘정상’이라고 규정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는 일이 ‘당연한’ 사회에서 ‘정상’으로 살아가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싶지만, 성소수자들에게 그런 연애는 당연하지 않다. 면접관/직장 상사의 무심하지만 노골적인 ‘애인 있느냐는’ 질문이 이들에겐 사회 규범을 재확인하는 고도의 검열이 되는 이유다. “세상이 네모인데, 당신도 네모입니까?”
‘정상’이라는 범주 내에서 살아가는 일도 결코 간단치 않다. 이성애 규범을 따르는 일에는 상대에게 ‘이성으로 보일’ 성 역할을 수행한다는 옵션이 붙어 있다. 즉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외모, 옷차림, 품성, 행동까지 ‘풀장착’해야 한다. 이는 누가 어떤 노동을 도맡느냐와도 직결된다. 결혼해 가정을 이룬 순간부터 여성의 일은 ‘육아’와 ‘살림’이 되고, 집 밖 노동은 남성의 일이 된다.
이 틀 밖에서 살아가는 성소수자들에게 삶은 고통이다. 이들은 그저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가는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알 수 없다. 직장에서는 폭력, 따돌림에 노출될 수 있고, 해고될 수 있다. 아니, 해고되기 전에 취직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제 인생이 ‘트루먼쇼’라고 생각했어요. 순간 의심스럽더라고요. 어떻게 짜 맞춰진 것처럼 삶이 고통의 연속이 될 수 있을까. 누가 조작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웃팅 당하고, 왕따 당하고. 어떤 형태로 사회에서 내가 억압받는지 계속해서 체감해야 하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을까.”(마늘, 젠더퀴어-퀘스처너리)
노동시장에서 성소수자가 받는 차별은, “포기해야 할 직장이 너무 많”(규원, 바이섹슈얼)다는 것, 더 정확히는 “거의 모든 직업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 자체다. ‘여자여야’ 뽑히고, ‘여자로’ 일해야 하는 직장으로 가지 않는 것을 선택한 이에게 남겨지는 일은 단기직이나 아르바이트뿐이다.
평생 아르바이트만 한다고 해도 문제는 생긴다. 그런 단기 일자리는 대다수가 서비스업으로, 대부분 ‘여자’를 채용하기를 원한다. 즉 화장을 하지 않거나 치마를 입지 않는 등 ‘여성에 적합한 외모’를 꾸미지 않는 사람은 아르바이트조차 구할 수 없다.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는 성소수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편의점, 식당 주방, 피시방 정도다. 최저시급과 고단한 육체노동으로 대표되는 일자리.
“일을 해보니까 일찍 병이 날 거 같아요. 확실히 육체적으로 어려운 걸 하니까 몸이 축나더라고요. 젠더 수행을 하기 싫은 사람은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고. 이런 걸 하면 일찍 죽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용도로 제가 사용된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살고 있어요.”(규원)

‘꾸밈노동’이 말해주는 불편한 진실
그렇다면 지정성별과 일치하도록 외모를 꾸미고 살면 인생이 좀 더 편해지는 걸까? 지정성별이 ‘여성’인 성소수자들은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외모를 꾸미든 꾸미지 않든 여성들이 직장에서 외모 규정, 외모 지적/품평을 피할 길은 없다는 사실이다.
직장은 물론 우리 사회 전반에서는 ‘여성’, ‘여직원’의 용모를 유독 강조한다. 외모를 꾸미는 일에조차 강력한 성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기계발의 한 영역이 된 외모 관리에서 남녀 모두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지만, 그럼에도 ‘더’ 꾸며야 하는 성별이 있는 것이다. SNS상에서 ‘여자는 고기처럼 부위별로 나뉘어 품평당한다’는 말이 떠돌듯, ‘꾸밈’은 유독 여성에게 강조되고 강요된다. “왜 머리 안 기르니?”, “왜 치마 안 입니?”, “살 빼면 남자들이 좋아하겠다”…… 일터에 들어온 이상 이런 식의 외모 공격과 성추행 발언을 피해가기란 어렵다. 다만 꾸미되 치마가 너무 짧아선 안 되고, 화장도 너무 진해선 안 된다. ‘여성에 적합한 꾸밈’을 수행하되, 그게 “여자가 그게 뭐니?” 따위의 소리를 들을 게 뻔한 꾸밈이어선 안 된다.
다시 말해 여성들에게 ‘꾸밈’은 하나의 ‘꾸밈노동’이다. ‘꾸밈’이 ‘노동’이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성소수자들의 경험과 비성소수자들의 경험이 만난다. 그들 역시 ‘여성에 적합한 꾸밈’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차별적 ‘외모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들 인생에 ‘여자처럼’ 꾸미고 ‘여자처럼’ 말하는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성별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의심의 여지없이 ‘여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들이 ‘여성 꾸밈’ 규정을 피해갈 길은 없다. 이 모든 게, 내 주변에 성소수자는 없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회사에서 ‘여직원’인 정현은 회사 밖에서는 남자로 여겨진다. 셔츠에 면바지, 옷차림은 어디에서나 같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정현을 ‘여직원’으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달라졌을 뿐이다.”
여성 혹은 남성만을 전제하는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성정체성인 ‘젠더퀴어-퀘스처너리’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한 인터뷰이(마늘)는 콜센터를 직장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다. 콜센터는 ‘용모 단정’ 같은 것을 아예 고용조건에 넣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콜센터는 노동자의 외모를 알 리 없는 외부 고객들의 평가가 중요한 직종으로, “말만 또박또박 하면 되는” 곳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몸이 가려진 곳에서 ‘뜻밖의 공정함’을 발견하게 된다.

실패한 모든 몸들의 이야기
낮은 지위에 있는 노동자일수록, 즉 여성, 낮은 연령, 불안정한 고용(비정규직)일수록 직장에서 더 많은 요구를 받게 된다. 특히 노동자의 성별화된 신체를 서비스 자원으로 활용하라는 요구는 매우 흔하다. 성별은 지위에 늘 관여한다.
“여자(성별)를 강조한다. ‘여자 말’을 하게 한다. (한때 논란이 된 114 안내 서비스 노동자들의 매뉴얼 멘트 “사랑합니다, 고객님”이 대표적이겠다. ‘여자 꾸밈’을 하게 한다. 여성다운 차림은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바를 고객과 직원 모두에게 각인시킨다. 여자 옷을 입은 노동자는 어디까지가 업무인지, 감정노동인지, 여성의 덕목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노동을 한다. 그 혼란이 이윤을 만든다.”
이것이 바로 ‘꾸밈노동’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또 하나의 진실이다. 비성소수자들과 성소수자들이 겪는 차별과 폭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말이다. 남자 혹은 여자의 꾸밈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는 세상에서 괴로운 이는 성소수자뿐만이 아니다. 꾸미지 않는 여자, 왜소한 남자, 선머슴 같은 여자, 깔끔한 남자도 괴롭다. 우리의 존재는 성소수자들과 무관하지 않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성소수자들이 사회의 다른 소수자들과도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공유한다고. ‘다른 몸’을 지닌 이들은 언제나 배제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체 사이즈가 아닌 몸”은 손쉽게 ‘장애’로 판명된다. 모두가 건강과 정상을 꿈꾸는 사회이지만 모순적이게도 ‘장애’의 영역은 더 넓어진다.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신체 범주가 점점 더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이 우리를 배신할까봐, 살이 찌거나, 주름이 지거나, 너무 빨리 노화되거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심해지게 될까봐”(실비아 페데리치), 다시 말해 우리의 몸이 ‘정상’이 아닐까봐 전전긍긍한다. 장애 여성, 나이 든 여성, ‘정상 체중’에서 벗어난 여성의 몸이 어떤 취급을 받으며 ‘여성’의 범주에서 배제되는지 떠올려보라.

퀴어는 일터에 있어야 한다, 퀴어인 그대로.
성소수자들은 스스로가 일반적인 길에서 벗어나 “제 길”을 간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의 벗어난 길이란 이런 류의 대화와 일상이다.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외모 품평부터 하는 대화 패턴, 아파트 평수와 자녀 성적과 남편 건강으로 채워지는, ‘이성애 정상 가족’의 ‘소소한’ 일상. “이 소소함과 평범함 속에 성별을 포함한 모든 권력 위계를 내면화하는 잔인함이 숨어 있다. 우리의 일상은 잔인한 상식을 이어 붙인 징검 다리와 같다.”
그 징검 다리를 밟지 않고 물가를 걷는다는 건 어떤 일일까. 어떤 이는 직장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밝히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또 어떤 이는 오히려 더 ‘주류’에 편입되고자 했다. 경계의 밖으로 가는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주류에 머물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저는 퀴어이지만 퀴어이고 싶지 않아요. 내가 ‘나’인 걸 받아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니까요.”(강표, 게이) 그럼에도, 가능한 한 커밍아웃을 하며 살고 싶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것을 빼놓고는 나를 설명할 수가 없거든요.”(혜민, 바이섹슈얼)
경계에 서면 그간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들이 낯설어진다. 일터의 성소수자들은 생산과 효율을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정상’으로 재생산해내야 하는 노동을 낯설게 바라보는 이들이다. 그들의 그 경계성이 경계의 안과 밖을 뒤흔든다. 경계에 선 성소수자들은 결국 “살아온 대로 계속” 살아갈 수 없는 또 다른 삶들과 만나게 된다. ‘정상’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규범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사라짐을 강요받는 수많은 존재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존재 자체를 이유로 사라짐을 강요받는다. 뚱뚱한 여자, 고분고분하지 않은 여자, 장애인, 질환자, 비대졸자…… 정상성에 부합하는 몸을 갖춰 환대받는 이들의 삶도 행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노오력’하고 ‘자기관리’하지 않는다면 누구든 손쉽게 퇴출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소수자들에게 응답해야 하는 이유다. 성소수자들의 ‘곁’인 우리가 더 이상 이들의 존재를 감추거나 예외화하지 않고 ‘드러냄’에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경계에 선 이들의 경험과 목소리에 응답한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 세상이 작동해온 방식에 의문을 갖는 일이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대로 계속 사는 대신 다른 삶을 꿈꾸는 일. 그러므로 퀴어는 일터에 있어야 한다. 퀴어인 그대로.”  
(출판사제공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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