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방황과 결기, 중년의 성취와 상실, 노년의 자족과 관조 이 모든 것을 품은 내 인생의 마지막 집

인생의 겨울을 함께할 세 동반자
어머니, 아내 그리고 고양이


큰 사회적 성취를 이룬 중장년기에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그저 추억의 실마리나 ‘옛날 물건’처럼 여겼던 저자는 노년에 접어들면서 점차 자신의 건강한 몸과 낙관적 태도, 깊은 절망 속에서도 다시 삶 쪽으로 방향을 트는 강인한 생명력이 어머니에게서 온 것임을 깨닫는다. ‘사람은 걸어 다니는 식도食道’라고 믿었던 어머니는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다 입으로 넣어서 뒤로 빼는 거라 안 카나”라며 차별당했던 나날에 대한 울분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했다. 모든 사람은 다 똑같다, 그러니 사람 사이에는 정情이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인간관은 지식과 학문의 세계에서 ‘리理’만 잔뜩 키운 아들이 그나마 균형감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이끌었다.

▲ 강상중 (지은이)/노수경 (옮긴이)/사계절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 앞에서 나는, 내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싶었다. 검은 태양으로 닫힌 세계에서 나는 반만 살아 있는 껍데기였다. 죽음이 삶을 침식해가는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런 느낌 속에서도 삶이 죽음에 승리했음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너무 슬퍼 물 한 방울, 쌀 한 톨 삼킬 수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먹고 있었다. 살아가는 기력을 잃었음에도 입을 움직이고 이로 씹으며 질긴 섬유질 음식마저도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인간은 어떤 때라도 묵어야제. 살아 있으마 마 묵는 기라. 묵으마 뒤로 나오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살아 있으마 그런 기라.”
마치 귓전에서 속삭이듯, 어머니의 가르침이 되살아났다. 의기소침한 내가 어머니에게는 한심하고 불쌍해 보인 모양이다. 내 인생 처음으로 이런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는 내 안의 교만과 긍지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저 불쌍한 아버지가 되었음을 뜻했다.
그럼에도 나는 먹기를 멈추지 않았다. 배설 또한 멈추지 않았다. 삶의 의욕이 죽음에의 유혹을 이겼다. - 240쪽

몸과 마음의 바탕이 된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저자와 인생의 마지막 집을 함께 지키는 건 아내 그리고 두 마리 고양이다. 저자는 식성도, 취향도 다른 아내와 수십 년 고락을 함께하며 어느새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가 되었음을 느낀다. 아내와 살면서 머윗대조림과 두릅튀김의 맛을 알게 되었고, ‘강아지파’를 고수했던 일평생이 무색할 만큼 어느새 고양이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아첨을 하는 ‘고양이파’가 되고 말았다. 이 책에서는 아내와 도란도란 땅을 일구고, 맛있는 음식에 군침을 흘리며, 도도한 고양이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는 강상중 교수의 색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비판적 지식인’이자 ‘우리 시대의 사상가’는 어딜 가고, 어리숙하면서도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집사’로 등장한 그의 모습에 절로 웃음 짓게 된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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