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서교육신문 김호이 기자] 우리는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동시를 읽고 커서도 학교에서 시를 읽는다. 시는 왜 읽어야 되는 것일까? 지난 202415일 금요일 저녁 7시에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별마당도서관에서 명시초청특강으로 인간으로서의 기본 태도와 자질을 양성하는 새말새몸짓 기본학교의 최진석 교장의 강연이 진행됐다. 최진석 교장은 이날 강연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시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인문학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라고 이야기 했다. 지난 202415일 금요일 저녁 7시에 별마당도서관에서 최진석 교장과 함께 현대인의 삶의 생존을 위한 통찰로서의 인문학과 시를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편 최진석 교장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욕망하는 인문적 통찰의 힘>을 출간했는데 <인간이 그리는 무늬-욕망하는 인문적 통찰의 힘>은 문()이란 원래 무늬란 뜻이다. 따라서 인문(人文)이란, 인간의 무늬를 말한다.

인간의 결또는 인간의 동선이라 부를 수도 있다. 곧 인문학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와 인간의 동선을 알기 위함이다. 과거는 인간의 동선뒤쪽이고 미래는 앞쪽 방향일 뿐이다. 그렇다면, 미래를 준비한다고 하면서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 ‘인간의 무늬를 가늠하지 않고 가능할까? 철학자 최진석 서강대 교수에 따르면, 인문학은 고매한 이론이나 고급한 교양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도구이다. 최근 한국 사회의 인문학 열풍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도 대학 안팎의 연구자들이 아니라 기업인들이라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인간이 움직이는 흐름을 읽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야 성공할 수 있음을 기업인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 곳곳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을 앞다투어 말하고 있다.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최진석 교수의 정의에 따르면, 상상력이란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의 방향이 어디로 움직일지 꿈꿔 보는 능력이다. 상상은 망상과 다르다. 망상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과 아무런 관계없이 멋대로 하는 생각일 뿐이다. 또한, 창의성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이 어디로 갈지 꿈꿔 보고 또 꿈꿔 보다가 그 나아가는 방향 바로 앞에 점을 찍고 우뚝!” 서 보는 일이다. 따라서 상상력과 창의성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인문의 향기를 피하면 안 된다. 상상력과 창의성을 최대의 핵심 문제로 생각하는 기업에서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인문학 없이 상상력이나 창의성도 없기 때문이다. 인문적 통찰의 힘, 그것은 바로 생존의 무기이다. 우리가 어떤 사태나 사건을 만났을 때 좋다또는 나쁘다라는 판단을 한다면, 우리는 그저 정치적 판단을 한 것일 뿐이다. 인문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에 길들여져 있다는 얘기다. 인문적 통찰은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이 세계가 움직이면서 그려 내는 도도한 흐름과 방향, 그 큰 흐름을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작은 일이나 현상들을 최진석 교수는 조짐이라 말한다. 이 조짐을 통해서 우리는 밑바닥에서 도도하게 작동하고 있는 큰 흐름에 올라탈 수 있다. 따라서 조짐은 문명의 방향이나 사태의 진행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조짐으로 읽힐 만한 어떤 현상을 보고 단지 좋다라거나 나쁘다는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것은 문명의 큰 흐름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단절시켜 버리고, 인식을 바로 거기에서 정지시켜 버린다. 인문적 판단을 하는 사람은 좋다라거나 나쁘다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인문적 통찰의 힘은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고 조짐을 읽는 능력이다. 흔히들 우리는 봄이 왔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이 존재할까? ‘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개념일 뿐이다. 땅이 부드러워지고, 새싹이 돋고, 잎이 펼쳐지고, 처녀들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그쯤 어딘가에 그냥 두루뭉술하게 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봄이 왔다!”라는 말은 진정한 의미에서 감탄의 언사가 될 수 없다. 익숙한 개념을 그저 답습하여 대충 말해 놓고, 무슨 큰 느낌이나 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기만이다.

진정으로 봄을 느끼는 사람은 봄이 왔다!”라고 대충 말하지 않는다. ‘이라는 개념을 무책임하게 내뱉지 않는다. 대신 바투 다가선 봄을 느낄 수 있는 구체적 사건들을 접촉한다. 얼음이 풀리는 현장으로 달려가 손을 대보고, 새싹이 돋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땅의 온기를 살갗이나 코로 직접 느낀다.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사건으로 을 맞이한다. 존재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사건이다. 봄을 개념으로 말하는 사람과, 봄에 일어나는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예민한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성숙과 인격의 깊이 차이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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