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헬레나 노르벨 호지

"여기서는 빨래하면 안돼요."
"아랫마을 사람들이 마시는 물이예요."
수줍은 목소리의 그 소녀는 손으로 개천 아래의 마을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빨래는 저 위쪽에서 하면 돼요. 그 쪽 물은 밭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이거든요."(본문 중에서)

 

여러분은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우선은 낯설음일 겁니다. 요즘은 밖에서 빨래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머리 속으로 그려보세요. 시골 마을로 이사 온 한 여인이 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그 지역 토박이 여자 아이가 다가와 수줍은 듯 조언을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소녀에게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솔직히 저는 '왠 오지랖이지?'라는 반감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의 내용들 중 그저 스쳐가는 이 부분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이 소녀에게서 타인에 대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빠르고 복잡하게 변해가는 지금의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배려란 그저 받고만 싶은 선물 같은 것이지요. 사실, 우리의 모든 선택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는 덕목은 배려가 아닌 편의입니다. 대형마트, 인터넷 쇼핑, 아파트 중심의 주거환경 등 우리의 소비는 거의 대부분이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타인의 존재는 사라져갑니다. 그저 나의 편의만 충족된다면 다른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자기 동네도 아닌 아랫동네 사람들의 식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행위가 다른 이에게 미칠 영향을 염려하는 것이지요. 편의를 위해서라면 새치기, 신호위반 등을 큰 죄의식 없이 행하는 우리에게는 빨래를 하려면 더 멀리 떨어진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아랫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저는 사실 부끄러웠습니다. 그 소녀의 순수한 배려가 잠시나마 어리석음으로 여겨졌던 것이 말입니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에게는 타인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타인에 대한 배려는 결국 나에 대한 배려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갈수록 배려에 서툴러지는 것일까요? 아마도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것을 돌려받지 못할까 두려워서 아닐까요? 나는 결코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닌데 너는 그럴지 모르니 나도 섣불리 배려를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생각에는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나의 무지가 깔려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려를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무지를 먼저 극복해야 합니다. ‘너도 나와 다르지 않다.’ 라는 것이지요. 책에 나와 있진 않지만 이 소녀의 마을과 아랫마을은 아마도 서로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가졌을 겁니다. 배려는 결국 쌍방통행으로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은 물이 있는 곳으로 빨래를 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우리의 일상 속에 더 이상 빨래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빨래를 하기 위해 물을 찾아가는 대신 그 물을 집으로 끌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을 얻는 대신에 타인과의 접촉을 잃은 것은 아닐까요? 편의라는 명분으로 말입니다. 옛날 빨래터는 단순히 빨래만 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은 한 동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공유되고 여론이 형성되는 소통의 장이었지요. 사람들은 빨래터라는 공간을 통해 타인과 접촉했던 것입니다. 각자 집에서 세탁기로 빨래를 하는 지금의 삶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편의의 무한 확장이 가져다 주는 실(失)에 대해서 애써 외면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이웃과 가깝게 살고 있습니다. 그저 문을 열고 다섯 걸음만 걸으면 옆집에 첫 번째 이웃이 자리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웃과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마음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편의의 부작용이 서로간의 대면까지도 불편하고 불필요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스스로를 불편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인사를 건네고, 길을 양보하고, 짐을 함께 나르는 등은 분명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 속에 배려가 숨어있습니다. 배려에 용기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편하고자 하는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먼저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위 글을 바라보겠습니다.
물을 집으로 끌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다크 인들의 삶은 흡사 체로키 인디언들의 그것과 닮아있습니다. 바로 자연과 인간이 같은 범주에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모든 것은 인간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생활 속에는 인간도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겸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을 미개발과 동일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자연에 인위를 더합니다. 심지어는 스스로 흐르고 있는 강을 살리겠다며 강바닥을 파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인위란 근본적으로 강압적이고 파괴적이기 쉽습니다. 자연의 일부이기를 거부한 인간의 발자취는 자연에 수많은 생채기를 내고 있습니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할 때만이 자연인 것인데 말입니다. 인류의 멸망을 다루는 영화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연재해를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파괴 행위의 대한 자연의 인내심이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는 우리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은 자신의 생태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파괴하며 살아가는 유일한 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다시 책의 제목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오래된 미래'
미래가 오래될 수 있을까요?
저자는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자연파괴와 생명경시현상 등 수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이 못하는 게 없는 듯 보이는 미래의 첨단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개발된 과거에 있다고 역설합니다. 서로를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즐길 수 있는 공동체 사회, 그리고 자연의 일부로서 상생하고자 하는 인간의 생활양식이 바로 우리가 다시 만들어 가야 할 오래된 미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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