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용린(전 서울특별시교육감)

정 직

정직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본대로 느낀대로 판단한 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는 신념을 갖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정직이다. 거짓은 사실과 다르게 진실을 왜곡해서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정직은 가장 소중한 덕목이다. 왜냐하면 진실을 바탕으로한 인간관계는 오래가고 더욱 두터워 지지만, 거짓 또는 부정직이 끼어들게 되면 어떤 인간관계든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당신의 자녀를 아름다운 인간관계(친구 간에, 부부간에, 부모-자식 간에, 스승-제자간에, 상사와 부하 간에)를 맺고 지속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려거든 정직을 우선적으로 가르치라.

우리 사회는 정직이라는 덕목의 우선 순위가 낮은 나라다. 조그만 이득이나 의리나 체면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너무 쉽게 거짓말을 하는 사회다. 밥을 안 먹고도 먹었다고 이야기해야 철 들었다고 인정받는 사회며, 거짓말을 하여서라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관행적 사고가 압도적인 사회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나 정경유착 그리고 유명한 인사들의 도덕적 추락은 바로 이런 관행화된 부정직에서 연유한다. 이런 관행으로부터 당신의 자녀를 단절시켜라.

선진국일수록 정직이라는 덕목의 우선순위가 높고, 교양있는 사람일수록 모든 일에서 정직을 우선시한다. 결국 한 개인의 성공과 행복을 위한 경쟁력은 정직에서 나오며, 회사나 조직 그리고 국가의 발전을 위한 경쟁력도 정직에서 나온다.

당신의 자녀를 정직하게 키워라. 그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약 속

약속은 계약이며 인격을 걸고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한번 맺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수도 없이 많은 약속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어떤 이는 매번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데, 어떤 이는 약속을 자주 깬다. 당신의 자녀는 어느 편이게 하고 싶은가?

인간의 삶은 대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모든 대인관계는 약속이라는 매듧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약속을 무겁게 여겨 잘 지키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지만, 약속을 가볍게 여겨 잘 어기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당신의 자녀는 장차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수한 약속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에게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무겁게, 무섭게 알게 가르쳐라. 결코 남과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가르쳐라. 아무리 기까운 친구와의 약속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과의 약속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한번 맺은 약속은 꼭 지키게 가르쳐라.

약속생활에도 규칙이 있다. 두 가지다. 첫째, 한번 맺은 약속은 꼭 지켜라. 그리고 둘째,약속이 중첩되었을 때에는 선약을 우선적으로 지켜라. 선진국이 선진국다운 이유는, 그리고 교양인이 교양인다운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 약속의 규칙이 잘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후진국일수록, 교양없는 사람일수록 이 약속의 규칙을 어긴다. 약속을 가볍게 여겨 자주 어기고, 약속의 선후에 상관없이 제게 이득이 되는 약속만 우선적으로 챙긴다.

당신의 자녀가 그런 사람이 되게 하지 말라.

용 서

용서란 마음 속에 맺힌 원망과 미움 그리고 한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는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자신을 해방 시키는 것이다. 즉, 남에 대한 미움과 원망과 한은 그 자체가 함정이다. 이 함정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가장 건강한 방법은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가 남에 대한 미움과 원망에 갇혀서 허우적 대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그런 미움과 원망을 훨훨 털어 버리고, 자신의 일에 생산적으로 몰두하기를 바라는가?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한때 자기가 가장 좋아했고, 존경했고, 가까웠던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미움과 원망과 한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괴로움은 결국 그 자신을 정체시키고 주변 사람들도 어렵게 만든다. 한 개인이 멍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람을 사귀는 방법도 가르쳐야 하지만, 멀어진 사람과도 가까워지는 방법도 가르쳐야한다. 사람 속에 살다보면, 좋은 사람도 생기지만, 그런 사람으로부터 상처도 입고 원망도 쌓게 된다. 이런 상처와 원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방법도 우리는 가르쳐야한다. 구것이 바로 용서의 기술이다.

용서에는 대비되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조건적 용서이고 다른 하나는 무조건적 용서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조건적 용서가 관행이었다. 상대방이 잘못을 빌고 뉘우치면 용서해준다는 것이 바로 조건적 용서다. 무조건적 용서는 상대방과는 상관없이 내 스스로가 내 안에 쌓인 미움과 원망과 한을 그냥 털어 내버리는 것이다. 교양있는 사람들일수록 무조적적인 용서가 많다. 조선조 시대의 무수한 당파싸움은 명분 때문에 조건적 용서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탓도 있다.

당신의 자녀에게 무조건적인 용서의 기술을 가르쳐라. 그래서 당신의 자녀가 인간관계회복의 기술을 터득하게 하라. 언젠가는 이 기술이 당신과 자녀 사이에서도 유용하게 쓰일지 모른다.

 

책 임

책임은 자신의 위치와 신분 그리고 직책에 지워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다. 부모로서의 책임, 자녀로서의 책임 상사로서의 책임, 아래 직원으로서의 책임, 공무원으로서의 책임, 어른으로서의 책임, 스승으로서의 책임 등등이 바로 그곳이다.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위치와 신분 그리고 직책을 갖게 마련이고, 그것에 따라 고유하고도 독특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권한을 갖게 된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출세하고 성공할수록 이 책임은 더 커지고 무거워진다.

어떤 종류의 직책에서든 주어진 권한과 의무를 공평하고 합리적이며 유능하게 처리해야할 책임이 발생한다. 이 책임의 수행에는 언제나 유혹이 따른다. 공익과 사익이 대립하고, 사익을 쫒고 싶은 강력한 유혹과 압력이 올 때가 많다. 어떤 이는 이런 유혹과 압력에 격렬히 저항하지만, 어떤 이는 쉽게 굴복하기도 한다. 당신의 자녀는 어는 편이게 하고 싶은가?

 

배 려

배려는 친절과 상냥함 그리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다. 배려에도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조건적 배려이고 하나는 조건적 배려다. 신분과 연령, 직업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하며 폐끼치지 않으려는 것을 무조건적 배려라하고, 아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상냥한 것을 조건적 배려라고 한다.

우리 한국사회는 조건적 배려가 강한 사회다. 모르는 사람에게 상냥하고 미소를 짓는 것이 금기시되던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전 세계의 교양 있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한다. 교양 있는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친절하고, 상냥하다. 전 세계의 교양 있는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게 그 자녀들에게 누구에게나 헤프달(?) 정도로 많이 웃고 친절하고 상냥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교양 있는 사람들은 설사 이혼한 상대방에게도 예의를 지키고, 친절하고 상냥하게 군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고 “속도 없다”고 빈정댄다. 친절과 상냥함의 세계적 기준은 아는 사람에게든 모르는 사람에게든 조건 없이 친절하고 상냥 하라는 것인데 우리 한국인의 기준은 아는 사람에게 또는 그럴만한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상냥 하라는 차별적 수준에 아직 머물고 있다.

영어실력의 세계화도 중요하지만, 친절과 상냥함의 세계화도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조건없이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는 태도와 품성을 구비하는 일이 교양 있는 한국인의 형성에 중요하고, 그것이 국가 브랜드 경쟁력의 튼튼한 기반임을 인식할 때가 되었다.

 

소 유

건전한 소유의식이란 제 물건과 남의 물건을 엄격히 구분하고, 제 물건 아닌 것에는 욕심도 내지 않고 손도 대지 않는 건강한 소유태도를 가리킨다.

우리는 주변에서 많은 소유의 혼란을 본다. “임자 없는 물건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것이 바로 소유의 혼란이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물건이 있다. 내 것, 우리 것, 남의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네 종류의 물건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내 것, 우리 것, 남의 것, 그리고 임자 없는 물건이다. 그래서 임자 없는 물건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에 임자 없는 물건이 있을 수 있는가? 무인도의 남극대륙조차도, 단 몇 사람이 발을 붙인 달나라조차도 임자가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지구상 어디에 임자 없는 물건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임자 없는 물건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임자 없는 물건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착각은 부모에 의해서 사회에 의해서 조장된 것이고 학습되는 것이다. 이런 착각이 사회를 어지럽게 만든다. “남의 물건엔 손도대지 말라”는 부모의 단호함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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